미국 휘발유 재고 사상 최악 속도로 빨려나간다 여름 운전철 앞두고 켜진 경고등
숫자 하나만 보면 평범하다. 하지만 그 숫자가 줄어드는 속도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국 휘발유 재고가 지금 그런 상황이다. 절대 수준은 위기라고 부를 정도가 아니지만, 재고가 빠지는 페이스는 1990년대 통계 집계 이후 본 적 없는 수준이다.
에너지정보청(EIA) 집계에 따르면 5월 22일 마감 기준 미국 휘발유 재고는 2억1160만 배럴이었다. 5년 평균을 밑돌고, 5월 기준으로는 2014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그래도 이 숫자 자체가 즉각적인 공급 부족을 알리는 경보음은 아니다. 진짜 주목할 대목은 재고의 절대 수준이 아니라, 시장의 완충 여유가 얼마나 빠르게 증발했는가에 있다.
통계 역사를 다시 쓴 감소폭
출발점은 한겨울이었다. 2월 초 미국 휘발유 재고는 2억5910만 배럴에 달했다. 그런데 5월 말까지 약 15주 만에 4750만 배럴이 빠져나갔다. 199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EIA 주간 데이터에서 2월부터 5월 사이에 이만큼 줄어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비교 대상을 찾기도 어렵다. 그 다음으로 컸던 감소폭들은 3000만 배럴 안팎에 몰려 있었고, 그것도 15년 전 이야기다. 올해 감소폭은 그보다 훨씬 크다. 물론 이것이 당장 휘발유 대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여름 운전철이 본격화되기도 전에 시장이 막대한 재고를 이미 태워버렸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 구분 | 수치 |
|---|---|
| 2월 초 재고 | 2억5910만 배럴 |
| 5월 22일 재고 | 2억1160만 배럴 |
| 15주간 감소폭 | -4750만 배럴 |
| 정유 가동률 | 94.5% |
가동률은 높은데 재고는 왜 빠질까
주간 석유 통계는 잡음이 많다. 정유 설비 정비, 수입과 수출, 수요 변동, 블렌딩 조정, 계절 요인까지 재고를 움직이는 변수는 한둘이 아니다. 한 주 치 수치만으로 큰 흐름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약 3개월 반 동안 4750만 배럴이 사라진 것은, 더구나 정유소가 풀가동에 가까운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가벼이 넘길 수 없다.
업계 데이터를 보면 모순이 뚜렷하다. 5월 22일 마감 주 미국 정유 투입량은 하루 평균 약 1700만 배럴로 전주 대비 하루 65만2000배럴 늘었다. 가동률은 94.5%까지 올라 이 시기치고도 평년을 웃돌았고, 완제품 휘발유 생산도 하루 990만 배럴로 견조했다. 평소라면 이 정도 가동이면 재고가 안정됐어야 한다. 그런데도 휘발유 재고는 그 한 주에만 추가로 260만 배럴 줄었다.
수요로도 설명이 안 된다. EIA에 따르면 같은 주 완제품 휘발유 공급량은 하루 926만 배럴로, 오히려 작년 같은 주보다 낮았다. 4주 평균도 1년 전과 사실상 같았다. 미국인들이 갑자기 기름을 폭발적으로 더 쓰고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강한 정유 가동과 미미한 수요 증가에도 재고가 이토록 빨리 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해외 시장이 미국 물량을 빨아들인다
해답의 일부는 교역 흐름에 있다. 미국 석유 시스템은 글로벌 시장과 깊숙이 연결돼 있다. 최신 석유수급 보고서에서 원유와 석유제품의 순수입은 한 주 동안 하루 마이너스 584만 배럴을 기록했다. 미국이 상당한 순수출국이었다는 의미다. 1년 전 같은 시기의 하루 마이너스 287만 배럴과 비교하면, 지금은 하루 300만 배럴을 더 내보내고 있다.
제품 수출도 작년 수준을 크게 웃돌았다. 글로벌 시장이 긴장 상태일 때 미국산 배럴은 국내 재고가 줄어든다고 해서 얌전히 안방에 머물지 않는다. 더 비싼 값을 쳐주는 시장으로 흘러간다. 올해는 그 점이 특히 중요하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 길목이 막히면서 국제 유가가 올랐기 때문이다. 다만 시장은 재고가 정말 위태로워지기 전에 차질이 해소될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 맞을 수도 있다. 외교적 해법을 기대하는 트레이더들은 일시적 충격을 종종 무시한다. 그러나 재고 추세는 그 해법을 기다리는 동안 시스템이 여유분을 야금야금 쓰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략비축유와 디젤이 더한 무게
전략비축유(SPR)도 배경의 한 축이다. EIA는 해당 주 SPR 재고가 910만 배럴 줄어 1년 전보다 3620만 배럴 낮은 수준이라고 밝혔다. 최근 SPR에서 빠진 주간 인출 규모는 역사상 최대다. SPR 방출은 정유사에 원유를 공급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원유는 휘발유가 아니다. 정제하고 블렌딩하고 운송해 지역 시장에 배달돼야 한다. 에너지 가격을 둘러싼 정치 논쟁에서 자주 잊히는 구분이다.
중간유분 재고도 경고 신호를 보탠다. 디젤과 난방유를 포함한 중간유분은 한 주 동안 210만 배럴 줄어 평년을 밑돌고 있다. 디젤은 트럭, 철도, 농업, 건설, 그리고 공급망 상당 부분을 움직이는 연료다. 디젤 재고가 빡빡해지면 휘발유보다 더 넓게 화물비와 물가로 파급될 수 있다.
트레이더가 주시할 포인트
그럼에도 가장 놀라운 통계는 휘발유 감소폭이다. 만약 연초 재고가 평년 수준에서 출발했다면 지금 상황은 한층 우려스러웠을 것이다. 다행히 시장은 2월에 이례적으로 두툼한 완충 여유를 안고 들어왔다. 문제는 그 여유가 역사적으로 드문 속도로 소진됐다는 점이다.
당장 휘발유 가격이 급등한다는 보장은 없다. 단기 연료 가격은 예측이 어렵기로 악명 높다. 외교적 돌파구, 수요 둔화, 수입 확대, 혹은 한동안 매끄러운 정유 가동이 재고를 안정시킬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구도는 실수의 여지를 좁혀 놓았다. 투자자가 점검할 핵심은 다음과 같다.